이순신 한산도대첩.학익진/명량대첩

 

 

충무공 이순신장군

 

 

 

 

 

 

명량해전을 앞두고...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

 

 

 

 

 

 

 

한산도대첩 - 학익진 전술

 

 

1592년 7월 8일 한산도 견내량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 56척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 73척이 견내량에 집결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병력을 섬뒤로 숨겨놓고 일자진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유인하게 된다.

 

일자진의 유인에 끌려들어온 일본수군이

 

쐐기진형으로 들어올때 일자진을 해체하고 돌격대형으로 포위하는 진형으로 변화를 주게된다

 

그리고 섬에 숨어있던 판옥선들이 전개해오면서

 

학익진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군은 학익진의 중앙으로 들어오는 형태가 되면서 갇히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훈련해온 배의 선체전환을 통해

 

한쪽에서 포구의 재장전을 하는동안 한쪽에서는 적군을 향해 포구를 들임리 수 있게 된다

 

이에 왜군은 이렇다할 반격도 없이 격파 당한다.

 

 

 

 

한산도 대첩

 

조선 격침 없음  /  일본주력전함 35척포함 59척 격침

조선 전사자 약간명 / 898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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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명량대첩

 

정유재란때 조선의 수군이 명량해협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한 해전. 명량해전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왜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와 칠천량의 대패로 남아있는 전선은 13척 뿐이었고

수군은 120명이 전부였다.

 

일본 수군의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순신장군은 일자진으로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총통을 쏘며 공격했다

숫자적으로도 부족한 전력이었으나 후퇴하지 않았다.

 

해류가 바뀌면서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유리해졌으며

왜군준사가 왜군 장수 를 가르쳐주자 이순신은 그를 잡아 끌어올린뒤 목을 베어 높이 달았다.

 

분노한 왜군이 덤벼들때 총통과 불화살로 전투를 하였으며

조류를 이용해 적선 31척을 격파하고 나머지 왜군을 도망쳐 달아났다.

 

 

명량대첩으로 인해 왜군은 서해로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애상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 명량대첩 영상 -